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스크바 공방전 (문단 편집) === 조용한 동맹국 === 소련이 병력을 한쪽으로 집중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, 독일은 설령 박살나는 한이 있더라도 동맹국인 [[일본 제국]]에게 소련을 공격할 것을 계속 요청했으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. 일본은 독소전쟁 발발 불과 2달 전에 소-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이다. 여기서 독일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는데, 일전에 독-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일본과 아무런 의논 없이 체결한 바 있었다. 당시 일본은 [[할힌골 전투]]에서 소련과 교전 중이었는데 방공협정의 동맹국이 협정의 주적이자 관동군의 교전국과 손잡은 것이다. 이 사건의 여파로 일본 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. 그런데도 이후 [[바르바로사 작전]]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 말라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. 일본 외무대신이 소련과의 조약을 맺기 한달 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불가침조약을 추진 중이라는 걸 알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. 이러니 일본 입장에선 그렇게 필요했으면 상의라도 하지 그랬냐고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. 이후 독일이 먼저 독-소 불가침조약을 깨 버리고 소련을 공격한 것을 본 일본은 회의를 했고, 육군을 중심으로 한 일부는 우리도 불가침 깨고 소련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정부는 이런저런 이유[* 대소 강경주의 기조였던 군내 파벌의 [[2.26 사건|숙군]], 소련과의 무력 분쟁에서의 참패 등.]로 어영부영한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. 당시 일본은 [[미국]]의 대일 물자 금수 조치 때문에 미국과 마찰이 계속되고 있었고, 미국의 수출 없이는 전쟁하기 힘든지라 일본은 어떻게든 미국을 달래보려 했지만 미국이 [[헐 노트]]를 통해 "[[만주사변]] 이전으로 돌아갈 것"이라는 당시 일본으로선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에 일본도 내부에서 격론 중이었다. 이런 상황에서 소련을 공격해 전선을 더 넓히는 건 불가능했다. 그와중에 일본에 있는 소련의 [[간첩]] [[리하르트 조르게]]가 일본이 소련 대신 [[진주만 공습|미국을 공격하려고 한다]]는 정보를 보내 왔는데 이미 조르게는 [[바르바로사 작전]] 몇 달 전에 독일의 침공이 6월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소련에 알린 적이 있었다.[* 당시 스탈린은 이를 독일이 일본을 도울려고 흘린 미끼라고 생각해 무시했다. 동부의 소련군을 서부에 배치하면 일본에 대한 방비가 약해지기 때문이다.] 당연히 스탈린의 조르게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져 있었고 이에 따라 극동에 주둔했던 병력 중 일부를 서부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.[* 소련도 혹시 모를 일본의 침공을 우려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병력을 다 배치하지는 못했다. 소련은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에도 항시 최소 30개 이상의 정예 사단을 극동에 주둔시켰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